북에 억류 되었던 푸에블로호 미군병사가 푸려나고 있다.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민주주의자 김대중과 71년 대통령선거(1)
본고는 이재봉 명예교수(원광대)의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민주주의자 김대중과 1971년 대통령선거’란 제하의 글로 전남 화순군이 주최하고, 김대중 추모사업회 주관으로 2021년 6월 29일 화순<김대중 기념공간>에서 열린<2021김대중 민주평화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원고다.
미국 국무부가 닉슨 행정부(1969-74)의 외교문서를 비밀 해제해 2010년 출판한≪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6, Volume XIX, Part 1 Korea, 1969-1972≫를 주 자료로 삼고. 김대중 저≪김대중 자서전≫(삼인, 2011), 정진백 편≪김대중 어록:역사의 길≫(사회문화원, 2010), 김경재 저≪김형욱 회고록:혁명과 우상≫(인물과 사상, 2009)등은 보조 자료로 활용한 것을 본지 발췌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1. 박정희의 3선 개헌과 미국의 상황
1969년 9-10월 제6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다. 기습적이고 변칙적인 ‘3선개헌’이었다. 박정희가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고 1963년과 1967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대통령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친 것이다. 박정희의 정권 연장을 위한 헌법개정 추진에 야당의원들과 대학생들은 1969년 6월부터 ‘3선개헌 반대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여당의원들은 9월14일 일요일 한밤중 국회 별관에 몰래 모여 기명투표로 개헌안을 처리했고, 10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이에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는 의회 절차가 생략된 ‘3선개헌’이 한국 민주주의를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할지, 이에 따라 야당이 더 강해질지 약해질지 가볍게 논의했다.두 달 앞선1969년7월 닉슨(Richard Nixon)대통령이 괌(Guam)에서 미국은 앞으로 제2의 베트남을 만들지 않겠다며 아시아 국가들에 군사 및 정치 개입을 될수록 자제하겠다는 이른바 ‘괌 원칙(Guam Doctrine)’ 또는 ‘닉슨 원칙(Nixon Doctrine)’을 발표한 터였다. 남한 국내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닉슨 행정부는 수렁에 빠져든 베트남전쟁 처리 이외에 한반도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했다. 첫째, 주한미군 감축 문제였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유지해온 미군 64,000명 가운데 1971년 6월까지20,000명을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베트남에 파병되어있는 한국군 50,000명 철수와 연계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했지만, 1971년 4월 실시될 대통령선거와 5월 실시될 국회의원 선거를 고려해야 했다. 게다가 그 무렵 북한군의 침투와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둘째, 1968년 1월, 미국 해군정보함 푸에블로호(USS Pueblo)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경비정에 나포된 뒤 승무원 80여명이 거의 1년만인 12월에 풀려났다. 닉슨은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유세하면서 푸에블로호 나포와 관련해 “미국이 어떻게 3등국도 못 되는 북한에게 그런 창피를 당할 수 있느냐”고 존슨(Lyndon Johnson)행정부를 비웃으며 비난했다.
그러한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3개월 뒤 1969년 4월 미국 해군정찰기(EC-121)가 동해 북한 영공에서 미사일을 맞아 격추되어 승무원 30여명 모두 바다 속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닉슨 정부는 그 정찰기가 북한 연안에서 40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서 비행하고 있었다며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북한에 대한 징벌 폭격을 검토했다.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USS Enterprise)호가 북한 근해로 급파되고,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보다 더 많은 구축함과 폭격기들이 남한으로 들어왔다. 북한 군용비행장을 공습할지, 북한항구를 봉쇄하거나 지뢰를 부설할지, 북한영해 안팎에서 잠수함 발사 어뢰로 북한군함을 공격할지, 핵대포로 비무장지대(DMZ)너머를 공격할지.....북한에 어떻게 보복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지 온갖 궁리를 짜냈다.
셋째, 몇 달 동안 북한에 대한 보복방법과 시기를 검토하기만 할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데, 8월 미군헬기가 비무장지대 북한영공에서 격추되어 3명이 부상당한 채 북한에 억류되어 버렸다. 미국의 ‘범죄행위에 대한 공개사과’ 없이는 미군을 풀어줄 수 없다는 북한과 실수로 북한영공에 들어갔다는 미국 사이에 몇 달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넷째, 미군헬기 승무원 3명이 북한에 억류된 상태에서 10월엔 미군 4명이 비무장지대에 매복해있다, 북한군에 살해되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와 국방부는 미군들이 비무장지대 근처의 불필요한 비행 훈련을 금지하고, 비무장지대 안에 적절한 엄호 없이 들어가지 말도록 조치했을 뿐 역시 북한에 보복할 수 없었다.
북한은 8월 억류한 미군 3명을 12월 미국의 ‘공식 사과’를 받고 풀어주었다. 미국은 헬기 승무원 3명의 석방을 확보하기 위해 헬기가 북한 통제의 영역 깊숙이 침투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에 서명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년 전 1968년 12월 있었던 일과 똑같았다. 미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치욕적 사과문에 서명한 뒤 푸에블로호 승무원82명과 시체 1구를 거의 1년 만에 돌려받았다.(중략) 그리고 미국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미국 협상대표는 사과문에 서명하기 직전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 문건에 서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도적 견지에서 승무원들을 돌려받기 위해서이지,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사과문 내용에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이러한 지속적 공격이나 ‘도발’은 베트남전쟁 때문이었다. 미국은 1965년 3월부터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남한은 1965년 10월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등 전투병 18,000여명을 포함해 1967년 7월까지 50,000명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북한은 1966년 “미국이 남한 괴뢰군대까지 투입해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는데, 사회주의 국가들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며, “조선은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 하겠다”고 했다. 북베트남에 공군병력을 보내는 한편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무장침투 및 공격행위를 급격하게 늘렸다. 1953년 7월 휴전 이후 1966년 이전까지 12-13년간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남한군과 미군 사망자 수는 10명 남짓이었지만, 그러나 1966년엔 70명 정도였고, 1967년엔 거의 300명이었다.
1968년 1월 ‘박정희의 목을 따러’ 특수부대원 30여명을 보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고, 미국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11-12월엔 특수부대원 120명이 ‘남조선 혁명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울진. 삼척 지역에 침투해 거의 두 달 동안 남한 토벌대와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했듯, 1969년 4월 미국 해군정찰기를 쏘아 떨어뜨리고, 8월엔 미군헬기를 격추했으며, 10월엔 비무장지대에 매복한 미군들을 죽였다.
북베트남을 돕기 위한 북한의 이러한 ‘모든 가능한 노력’ 때문에, 남한은 1968년 3월까지 남베트남에 1개 사단병력을 추가로 보내려던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미국은 남한이 베트남의 병력을 줄이거나 철수하면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심지어 베트남에서 철수를‘ 고려하기만 해도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전이 확실해지고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군사 및 정치 개입을 줄이겠다고 표명했는데,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리며 골머리 썩이던 뒤숭숭한 상황에서 박정희가 정권 연장을 위한 ‘3선개헌’을 했던 것이다.
2.김대중과 1971년 대통령선거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평가(다음호 계속)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외교, 평화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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