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의 '역사의 판단'
역사의 판단?
역사의 판단이란 말처럼 애매모호한 말도 없다. 이 말은 어떤 사건이 논쟁의 여지가 있어 쉽게 판정될 수 없기에 언젠가 미래의 세대 가운데 그 판단을 선의의 다수에 맡겨보자는 것이다. 이때의 다수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미래에 나마 억울한 누명이 풀린다고 하면 다행이긴 하지만, 지금 억울한 사람은 미래에 존재하지 않기에 사실상 의미는 없는 것이다.
이 말은 헤겔을 연상시킨다. 어떤 사안은 당대에 판단될 수 없고,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냉철하게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사안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헤겔이 한 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편다.”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언뜻 공정한 시선처럼 보이지만, 달리 보면 현재를 미래에로 위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문제를 연기시키는 것이고, 회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가해자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그것은 명백하게 공정성과 제 3의 시선을 표방한 도피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그런 말을 하면 이것은 그야말로 절절한 호소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역사의 심판’에 대한 희망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역사가 사마천의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초대 기독교 역사가인 신약성서 저자들이다. 그들은 당대의 억울함을 각각 미래의 어느 역사의 시점에 다가올 선의의 시선이나 초월적인 공정한 심판자에 호소하였다.
사마천은 억울한 친구를 변호하다가 그만 왕에게 궁형을 당하게 된다. 그는 당대에는 누명을 풀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후대에라도 호소하기 위해서 역사를 서술하게 된다. 후대의 사람들은 나중에야 그가 어떤 억울함을 당했고, 그가 어떤 상황에서 역사를 서술하게 되었는지를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역사는 바로 정의의 심판자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선의의 다수가 미래에 존재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신약성서에 보면 예수나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무리들은 박해받으며 죽어가면서 자신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미래의 심판자에게 호소한다. 이 세상에서는 공정한 심판자가 없다고 판단하고, 처절하게 저 피안의 세계로 돌아가 그 심판자가 반드시 자신의 억울한 누명이 풀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그 미래의 심판자가 공정하게 평가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종말론은 심판론 이다. 천국은 이 점에서 보면 많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 입으로 시인한다고 해서 가는 긍정적인 장소가 아니라, 억울함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나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발견한 도피처이다. 그와 동시에 천국은 나를 억울하게 한 사람을 심판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인 것이다.
제3의 심급, 공정한 관찰자가 없을 경우에 사람들은 쉽게 이러한 미래의 역사나 초월적인 종말에 기대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역사의 판단에서 도피처를 찾고 있지만, 그 뉘앙스는 현저하게 다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역사의 판단’은 절절한 절규인 비해, 가해자입장에서는 위기 모면용이 되는 것이다. 정치가들의 말하는 미래형 수사는 거의 거짓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과거의 경험이 증명해 주기도 하지만, 심리적으로도 현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심사가 미래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 자에게는 언제나 과거나 미래에 기대어 도피하려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글/ 서기원(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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