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선생님과 스승님은 다른 말이다. 스승은 '나는 누구인가(Who am I)?'를 철저하게 깨달고 그 깨달음을 제자의 생명 위에 복사하는 분이다. 우리말에서 'ㅅ'은 '쑥쑥 솟다'처럼, 성장과 높음을 의미한다.
사법부, 사정기관 등은 권력기관이며 솟을 문은 치켜 올라간 문이며 솟대는 하늘로 향한 염원의 상징이다. 그 솟음의 기운을 위에서‘ㅡ'로?가로 막으면 ‘시옷’이 ‘지읒'이 되어 솟구치다가도 졸려서 주저앉게 된다.
들떠 솟아나던 감정도 자작자작 잦아들어 자장자장 잠들게 된다.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쉼 없이 흐르는 삶의 강에서 대나무의 마디처럼 정확한 시기에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 받는 것으로 실로 기적과 같은 행운인 것이다.
어미 닭과 병아리가 생명을 걸고 이루어 내는 동시동탁(同時同琢)과 같은 일대 사업인 것이다. 어미가 일찍 쪼아 미리 구멍이 나면 병아리는 말라 죽고, 잠시라도 늦게 깨어 주면 질식하므로 어미와 새끼는 생사를 걸고 바로 그 순간 그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절묘한 시차로 새끼를 살려 내고, 먹이고, 수 없는 생존 술을 몸으로 익혀 살아갈 능력을 몸에 체득시키는 것, 곧 '가르침'이다. '갈다'와 '치다'의 합성어 '가르치다'는 단순한 방향 '가리킴'의 정보 전달이 아니다. 생명의 탄생과 지속적인 살림으로서의 '가르침'은 무섭게 엄정한 삶 자체이다.
스승 또한 비인부전(非人不傳)처럼 제자를 가르치되 단호한 기준이 있었다. 다물을 국시로 고조선의 정신과 땅을 '다물'려 받으려 했던 고구려에는 애국가라고 할 수 있는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가 있어 스승과 제자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을밀대를 세운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지어 국민들이 아침저녁으로 부르게 하니, 그는 재상 을소(乙素) 재상 을파소(乙巴素)의 후손이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선조이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된다. 법은 나지도 죽지도 않고 위는 귀함도 천함도 없도다.(중략) 참 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광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 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중략-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더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로워라."
누구나 하늘아버지, 땅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의 가르침은 한인, 한웅, 단군 스승으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 왔다.
개인과 전체의 생명을 걸고 이어져온?한민족의 '스승과 제자' 라는 깨우침 문화는 인류보편의 최고가치가 아닐 수 없다. 그 정신과 에너지를 다물(多勿)려 받아 고구려, 발해의 국혼이 되고 마침내 대한민국을 열었고, 헌법으로 또다시 스승의 가르침을 폈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선조 스승들의 가르침은 가면 지워지고 오면 변하는 단순 정보가 아니라, 피를 통하여 이어져 온 불생불멸의 생명 실현이었건만, 오늘 우리는 그런 스승을 제대로 모시고 있는지 자문 해 볼일이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는 스승의 자리를 후세에 평가 받게 한다. 그러하므로 제자 된 자, 한 숨, 한 숨, 일 거수 일 투족 마다 자신에게 물어 볼 일이다. “내 가슴엔 똑 같이 닮아가고 있는 스승님이 살아 계시는가"?
글/ 원암 장영주
(사)국학원장/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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