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몸이 불편하고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희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쩡한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성폭행하고 대낮에 강도짓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때 사람들은 혀를 차며 세상 말세라고 한탄한다.
말세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미(未)와 이제 끝장이 났다는 말(末)자를 자세히 보면 두이(二)자의 획이 짧고 길고가 전도 되어 있다는 차이 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곧 윗 막대는 상대적으로 상위자요, 아래막자는 상대적으로 하위자이며 거기에 사람을 더하여 세로막대<1>로 걸러 놓음으로써 동양의 사회관을 이 두 글자에 집약 시켜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은 권력으로 지배를 하는 자와 지배를 받는 자, 부자와 가난한 자, 힘센 자와 힘없는 자,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폼 잡기를 좋아하는 자와 겸손한 자등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되어있으며 이 상대적 개념에서 하위자가 상위자보다 살기 좋은 세상은 미(未), 미래이고 앞날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상위자가 살기 좋고 하위자가 그에 짓눌린 세상은 말(末), 종말이다.
곧 희망이 없는 세상 끝장이라는 구현된 글자들이기도 하다. 말세론이 퍼지는 세상은 예외 없이 하위자의 불안이 배재돼 있었기에 예외가 없다. 옛날이나 오늘날에도 백성들의 불안을 악용하여 말세를 주장하고 자신이 구세주임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많은 유사 종교가 탄생됐던 것이다.
신라시대 말경 악정으로 백성이 극도로 핍박받고 있었을 때 궁예가 나타나 스스로 구세주인 미륵불임을 자처하고 머리에 금관, 몸에는 가사를 걸치고 한 아들은 천광보살 또 한 아들을 신광보살이라 일컬어 거느리고 다녔다. 고려시대 말경 때도 신돈이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말세론을 펴고 스스로 자기가 구세주라고 자처하고 다녔다.
심지어 마른 콩을 수십 섬 땅에 미륵불상과 더불어 묻어놓은 다음 물을 주어 미륵불상이 저절로 솟아나오게 하는 기발한 수법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사기 쳐 자신이 미륵불임을 과시했다. 한말에도 혼란기에는 전주 모악산과 계룡산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등에 업고 말세 때라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지구가 없어진다며 천지개벽을 내세운 유사종교가 수십 개, 수백 개가 난립했었다.
궁핍과 불안이 감돌던 일제 말에도 가짜 미륵이 나타나 시한성의 말세를 부르짖고 이, 정, 유, 장, 강(李,鄭,柳,張,姜)다섯 성의 사람끼리만 남부여대(男負女戴)<남자는 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이고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하여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개벽천지 사기극을 벌이다 지리산 세석평전에 이주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사기극이 들통 나 미륵만 남겨놓고 모두 하산해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쳤다. 석가여래는 현재불이요, 미륵보살은 말세 때 나타나 구세하게 되어있는 미래불이기에 수천 년 동안 유사 신흥종교에서 악용돼 내린 불행한 보살님인 것이다.
20년 전 마이산 암봉 아래에서 도통하여 미륵의 영험을 얻었다는 한 교주의 말세론에 유인되어 광주 인근 부녀자 70여명이 남편, 자식 다 버리고 무단가출하여 집단기도를 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또 오늘날에도 어떤 사이비교주는 자기가 발을 씻던 물만 마셔도 암환자는 병을 고친다고 사기를 쳐 전 재산을 팔아 그 교주 밑에 갔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다.
요즘은 중국에서까지 전화(보이스피치)로 사기 쳐 수백수천만원을 챙기는 악랄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회가 불안하면 독버섯이 자라고 멀쩡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시국에 불안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오늘날은 가짜가 판치는 요지경세상이다.
똑똑하고 멀쩡한 사람이 사기를 당하는 것을 보면 나도 언제 사기 당할지 무섭기까지 하다. 욕심 부리지 말고 진실한 사람과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하루하루 살면서 주변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돌보며 살맛나는 세상을 만나고 싶다.
박태원-세상 말세론(末世論)
글/박태원(논설위원, 호원초등학교장)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