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노무현
먼저 유대인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가 보자. 유대인의 상상력의 원천은 야훼가 자신의 민족을 선택하였고, 자신들을 통하여 세계를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희망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계약신학의 전통이 그렇고 메시아 대망 사상이 그렇고, 오늘날 유대인들의 시온이즘이 그렇다. 이러한 상상을 바탕으로 해서 유대인들은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고 현재의 작은 고통에도 감내하면서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나름의 신앙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희망에 좌절을 안겨다 준 사건이 있다고 한다면 아우슈비츠에서의 600만 대학살이었다. 이들의 질문은 야훼에 의해서 선택받은 우리 백성들에게 어떻게 이러한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다. 야훼는 도대체 살아계시기나 한단 말인가? 정직하게 당신을 믿으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은 어떻게 그런 일을 용인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구약성서의 욥 이후 기독교 전통에서 해명해야할 신정론의 문제이다. 한편으로 이 문제는 매우 풀기 어려운 난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들 또한 아우슈비츠 이후 이러한 난제에 직면해서 새로운 신정론을 구축해 간다.
이렇게 해서 두 개의 신앙의 생겨난다. 하나는 여전히 신은 살아계시며 장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다는 신앙과 다른 하나는 신은 이미 역사적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함께 하시며 이미 오셨고 이제 남은 것은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뿐이라는 신앙이다.
역사 사회적 맥락으로 돌아와 보자. 인정하기 싫지만 역사에는 언제나 기득권자와 이 기득권에서 밀려난 소수들이 존재해 왔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보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를 나누어 분석한 것은 이 점에서 그 적실성을 갖는다.
기득권자들은 새로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이미 잘 되어 있고 잘 돌아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기득권 세력에 도전 생각이나 시도들이 언제나 생기게 마련인데, 기득권자들은 이러한 생각들을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기득권 유지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허용한다. 그래서 나름 포용력이 있는 체 한다. 하지만 이들의 힘이 점차 커지면 이는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 되어 버린다.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고자 한다.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도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희생양을 만들어 낼 필요가 생긴다.
이때 억울하게 처형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순교자들이 전형적으로 이러한 희생양이 되었다.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그렇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시 오신 예수의 운명이 그렇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도 엄밀하게 보면 당시의 율법(교리)을 수호하려는 기득권자들에 의한 희생양이다.
민중들은 이러한 희생양을 보면서 겁을 먹는다. 혹시 나도 그런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려고 한다. 예수를 쫓아 다녔던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자신이 하던 일로 되돌아갔다. 기득권자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신조차도 그를 버렸다고 말하려 한다. 그들이 믿는 신이 존재한다고 하면 당장 기적이 일어났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숨죽이며 숨어 지냈던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한다. 자신의 용기 없음을 후회하며 점차 용기를 발휘하게 된다.
제자들은 다시 모여 먼저 가신 ‘그 분’을 떠올리며 그분을 기념한다. 이제 ‘모이는 사람들(교회)’가 점차 커져 간다. 내가 살지 못했던 그분의 용기 있는 삶을 떠올리며 그분처럼 살겠다고 용기를 다짐하는 컬트(cult)가 생겨난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고(故)노무현 대통령은 가정이나 출세보다는 약자를 위한 인권 변호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고, 특정 지역의 이익보다는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차별이 없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하였다.
그의 정치적 경력이 말해 주듯이, 모두가 안 된다고 하는 다른 지역에 가서 출마를 하기도 하고 하면서 평생 망국적 지역감정에 대항하며 정말 ‘바보’처럼 싸운 사람이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언제나 ‘바보’였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 “바보회”라고 지은 것과 흡사하게 그는 스스로 학벌과 군벌 그리고 지역감정으로 얼룩진 사회 한복판에서 ‘바보’처럼 행동하였다. 모두가 그를 버렸다.
그의 현실성 없는 대안에 안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말을 한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가 언제 이 잘못된 것을 바꾸겠냐고 한다. 노무현을 성자처럼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가 무엇을 위해 살았고 우리들은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매주 주일이면 예수를 떠올리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또 해마다 4월과 5월 그리고 6월이 오면 우리의 정치사를 떠올리게 된다. 매주 마다 나에게 날마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뿐만 아니라 풍족한 삶으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일까? 아니면 바보처럼 이 세상에 오셔서 바보처럼 돌아가신 십자가의 삶을 기억하면서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으며 그분이 뜨겁게 살았던 삶의 현장을 돌아보아야 진정한 신앙일까? 또 다른 ‘바보’들의 ‘교회’를 기원하며....
서기원-예수와 노무현
서기원(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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