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웃어주었더라면…
여기, 사과하다가 죽은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오페라 극장에서 극을 관람하던 중에 재채기가 나와서 본의 아니게 바로 앞좌석에 앉은 통신부 장관의 목 뒷덜미에 침방울을 날렸던 것이다. 하급관리였던 남자는 장관에게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은 죽고 만다.
간이 벼룩이 간만도 못한 이 남자는 아마도 심장마비를 일으켰던 것 같다. 재채기 같은 인간의 자연스런 생리현상 때문에 목숨까지? 그렇다, 재채기 한 번 잘못하면 이 남자처럼 정말 죽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은 19세기 러시아 소설 속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사실 여기 나오는 장관님은 목덜미에 침 몇 방울 튄 걸 가지고 ‘사람을 잡는’ 그렇게 협량한 분이 아니다. 장관님은 다만 장갑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닦아내면서 뭐라고 한 마디 투덜거렸을 뿐인데, 너무나 기가 약한 뒷줄의 남자가 장관님의 권위에 스스로 눌려서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어느 관리의 죽음>은 ‘거세 공포증’에 사로잡혀서 제 명을 재촉한 한 남자의 아주 짧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 장관님께서 조금만 친절하게 그 남자의 사과를 받아주기만 했어도 불행을 막았을 텐데. 가엾은 그 남자는 오페라 막간 휴식 시간에도 장관을 만나서 거듭 사과한다.
“아 됐소, 이미 다 잊었는데 계속 같은 말을 할 거요!”라고 아랫입술까지 실룩거리는 장관을 보면서 남자는 더욱 오싹해진다. 아, 장관님, 그때 딱 한 번만 온화하게 웃어주셨더라면 남자가 그렇게 계속 귀찮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 남자의 아내까지 거들고 나선다. “그래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세요. 그분이 당신을 처신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니까.” 예나 지금이나 ‘찾아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이발까지 하고 새 제복으로 갈아입은 남자는 장관의 집무실로 찾아간다.
한창 업무에 바쁜 장관님께 들러붙다시피 하며 거듭 사죄하는 남자.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아주십시오!” 세상에 일부러 재채기를 남의 뒤통수에다 대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장관님이 돌아버릴 지경이다. “날 놀리는 거요, 당신!” 장관님이 어이없어하자 남자는 크게 상심하여 돌아온다.
이때 장관님이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서 남자의 사정을 알아봐줬더라면? 가엾은 남자는 장관님이 풀어지실 때까지 들이댈 수밖에 없다. 다음날 용기를 내어서 또 장관님을 찾아간 남자는 제가 어떻게 감히 장관님을 놀릴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재채기를 하다가 침이 튄 걸 사죄드리려고 했을 뿐인데, 라고 머리를 조아린다. “당장 나가!” 드디어 장관님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노발대발하신다. 이때 장관님이 조금만 자제를 하시고, 남자를 잡상인 취급하지만 않으셨다면?
이 ‘웃기는’ 상황에 결코 웃을 수만 없는 것은 소위 말하는 재수 없으면, 나도 그런 경우에 처할 수 있다는 가정을 딱히 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상호 간의 소통부재는 죽음까지 불러온다. 인격살인이라는 말도 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불분명한 이것에 휘둘리면 누구라도 무고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
공포에 질린 남자의 뱃속에서 뭔가가 끊어졌다고, 소설의 말미에서 말하고 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간신히 뒷걸음질을 쳐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고 하니, 자신의 진심이 통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실의에 빠진 그 남자는 아마도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 같다. 그깟 일로 경기를 일으키는 위인이라면 죽어도 싸지. 독자들은 이렇게 한심한 남자를 몰아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제거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이상 징후를 나타내는 거세 공포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넘어서, 불완전한 인간의 일반화된 심리라고도 이해될 수가 있다. 직장에서 잘릴까봐 상사에게 복종하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당할까봐 무리지어 행동하는 등, 어쩌면 적당한 거세 공포증은 오히려 안전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는 장치가 되는 게 아닐까. 독불장군으로 혼자 튀다보면 위험하니까 말이다.
여기, 러시아의 그 남자 못지않은 거세 공포증세의 남자가 또 있었다. 요즘 전철 안에서 일어난 사건, 새파랗게 젊은 한 남자가 한 노인에게 가한 폭력적인 언행이 적지 않은 시민들의 피를 들끓게 했다. ‘막말 남자 사건’이라는 명칭부터가 ‘싸가지 없어’ 보이는 이 불유쾌한 뉴스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한 그 젊은 남자에게 그러니까, 그 어르신께서도 한 번만 부드러운 웃음을 보여주셨더라면? 미소는 상대방에게 절대로 악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소통의 방법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황영경 교수의 문화 오딧세이 ‘책이 있는 풍경’
황영경 교수(신흥대문예창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