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세중 그는 누구인가
1937년생인 무세중(巫世衆)은 이 시대에 사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이고 깨어남을 가르치는 예술전사다.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을 떼어버리고 인민‘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본지는 무세중 그는 누구인가?란 제목으로 3회 걸쳐 소개하려 한다.
● 무세중의 삶과 예술
무세중은 1937년 서울 장교동(지금의 3.1 빌딩 자리)에서 사업을 하시는 아버님(金容玉)과 어머님(李乙順)사이에서 9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환경 속에서 정의로움으로 고교시절을 보내던 그는 “젊은 청년 학도들에게 고함” 이라는 글을 써서 각 고등학교 회장들에게 나누어 주고 전국 고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정우회(正友會)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정기적으로 고아원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보살피고 방학 때는 농촌 봉사 활동을 하며 독서회 토론회를 열어 사회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대학 시절에는 1958-1959년 2차례에 걸쳐 도보로 우리나라 국토 순례 무전여행을 감행하여 팔 천리를 걸었다.(1959년 8월 21일 연합신문 보도) 그 여행 중에 수차례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그는 이 땅의 삶과 사람과 자연과 민속에 대해 알게 되었고 삶의 좌표가 의식화 된다.
1960년대는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 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곳에서 민속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봉산탈춤 (이근성), 양주 별산대 놀이(김성대 선생), 동래 들놀음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 춤(남형우), 고성 오광대(장재봉) 춤을 익히고 전수 받아 한국 탈춤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69년 10월 14일 YWCA에서 춤을 가르쳐 주신 네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열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감동의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속의 새로운 재창조를 위한 민예 부흥 운동가로서 1971년 <東亞 民俗 藝術院>을 설립하고 <극단 民族>을 창립하였다.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 < 민속극 창조 기능의 재활 >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섰고 민족극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미래 지향적인 민속의 탄생을 도모하였다.
우선 먼저 서울 한복판 덕수궁 뒤뜰에서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 북청사자 놀음, 송파 산대놀이, 산신굿, 마당극제, 판소리 마당굿을 기획 공연 하였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30여개 대학에서 마당굿 놀이를 순회 공연하고 탈춤반을 만들어 지도하며 축제 무대 공연을 시도하게 하였다
또한 <남사당>을 사단 법인체로 승격시켜 유랑 예인 집단의 체계적 발전과 정착을 위한 창립 작업에 몰두하였고,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를 기획 연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라는 탁월하고 선구자적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 연주회(1973), 마당극제(1975년), 노비 문서 전시회(1975),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1977)를 총 기획 연출하였으며 그동안의 익히고 배운 것들을 총망라하여 1975년 11월 29일 명동 국립 극장에서 무세중 창작 발표회 < 전통과의 충돌 >을 공연하게 된다. 김민기의 <아침 이슬>과 킹 크림슨의 <에피타프(Epitaph)>를 배경 음악으로 탈춤을 추었던 획기적이고 이변적인 <전통과의 충돌>은 현실의 어둡고 부조리한 상황들로부터 멍든 사회를 통렬하게 조롱하고 비판했다. 이것은 주체 의식을 일깨워 전통의 노예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민속의 계승자로서 현대속의 민속을 창조하려는 무세중의 진보 정신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예술 풍토에 있어서 전위극은 비도덕 시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너무 앞서가거나, 전통의 배반자, 불순한 이상주의자, 빨갱이 정도로 여겼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그는 홀연 독일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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