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성지순례?
여름휴가철이 되면 괜스레 마음이 바빠지거나 허랑해진다. 남이 장에 간다고 덩달아 따라갈 수 없는 이들에겐 차라리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가 차라리 반가운 벗이다.
‘방콕’에서 죽치고 앉아 있어도 그다지 체면 손상될 게 없을 터. 그렇다면 배 깔고 엎드려 식은 죽 떠먹기보다 더 쉬운, 세계 최고의 설산 여행으로 떠나는 휴가 법을 여기 소개한다.
박범신의『비우니 향기롭다』,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사색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작가의 트레킹 여행 기록이다. 공간 이동만이 먼 여행이 아니라고 하듯이, 우리는 잠시 시선의 움직임만으로도 작가를 따라 4천 미터 높이의 이상향 ‘샹그리라’로 오르는 성지순례의 길을 떠난다.
단 일상의 전투복을 벗어던지고 최대한으로 몸과 마음을 가볍게 만들 것. 보는 사람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니 고가의 명품 트레킹 장비 따위는 절대 금물! 사실 이런저런 여행 후기의 책들은 허다하지만 “나는 내 가슴 속 폐허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실토하는 작가의 진담에 끌리는 것은 우리가 함께 질곡의 시간 속을 헤쳐 왔다는 동료의식에서일 수도 있다.
작가 자신도 이것은 일반적인 여행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잃었던 ‘내 안으로 들어간’ 기록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나의 내부엔 초월적인 세계로 떠나고 싶은 원심력과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사랑하며 살고 싶은 구심력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 심심한 개들이 아이들의 볼을 핥아주고, 낯선 이방인 앞에서 콧물을 후루룩 들이마시는 아이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동네. 얼굴에 사회적 자아의 가면을 쓰고 타인을 대할 필요가 없는 그곳에서 작가는 꿈에 아버지를 만난다.
속병이 깊어져 아무런 민간요법도 효험이 없자 결국 “비장한 표정으로 단숨에 한 대접의 똥물을 마시는” 아버지를 작가는 왜 에베레스트로 가는 설산 길목에서 만났을까? 모든 것을 뿌리치고 홀연히 떠나온 그는 어쩌면 거기서 쫒기고 있는 자기 자신과 맞닥뜨린 게 아닐까.
보통 나흘이면 올 수 있다는 코스를 여드레나 걸려서 왔다는 자괴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작가는 한 외국남자 앞에서 심하게 부끄러워한다. 굳이 날짜 계산을 하지 않고 다닌다는 그 외국인은 혹시 가진 것은 시간뿐인 사람?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한국에서 ‘잘 나가는’ 작가의 고개를 숙이게 했을까? 달리기 시합을 하듯이 살아온 한국인의 훈련된 관성이 자신의 몸 안에 각인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자문자답을 듣는다.
당신이 겪은 비인간적인 가난 속에 처자를 그냥 내박쳐두지 않으려고 지난 반세기 동안 불철주야로 달려온 아버지들, 이제 길을 잃고 쓸쓸한 세대가 되어버린 그들의 모습을 히말라야를 걸으면서 또렷이 보았다는 작가 역시 그 대열 속으로 합류해가는 자신을 문득 발견한 게 아니었을까.
길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법의 절반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는 성현의 말씀에 꽂혀서 무작정 떠났다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깨달음이라도 얻고 돌아온다면 전혀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닐 터.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트레킹의 본질만 알게 되더라도 필시 본전은 뽑고도 남을 수도 있는 것.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빨리 가고 늦게 가는 차이가 아무 의미도 없고,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한번 길에 들면 용빼는 재주 없이 그냥 걷지 않으면 안 되니 그저 히말라야 품속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같은 눈높이로 고요하다는 것. 그것이 신에게 가는 길과 같은데 누가 감히 신에게 가는 초입에서 자신들이 타고 온 거만한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겠느냐고 작가는 묻고 있다.
작가는 주기적으로 혁명을 꿈꾸었다고 고백한다. 정말 누군들 그렇지 않았겠는가? “내게 혁명이란 세계를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험적으로, 혹은 환경이나 습관의 축적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느끼는 일상 속의 나를 통째로 뒤집어 변화시키는 일이다.” 어째서? 내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세계가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아주 ‘무거운’ 명제를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영원한 청년작가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육체는 우리의 영혼이 잠시 머물다 가는 여인숙이라고 말한다.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으니까. 이쯤 되면 이거, 완전 성지순례 코스 아닌가. 아하, 비우니 향기롭다? 제목부터가 어쩐지 그 쪽 냄새를 풍기더라니.
황영경교수의 문화 오딧세이 ‘책이 있는 풍경’
황영경 교수(신흥대 문예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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