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사람이야?
아침에 깨어나 보니 자신이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딱지가 딱딱한 갑각류의 곤충이 돼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짧고 가는 여러 개의 다리로 버르적거리고 있다면?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하루쯤 결근이나 결석한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도 아닌데, 다시 이불깃을 끌어다 쓰고 잠으로 빠져들 수 있다면. 이런 분들은 참 부럽게도 통 큰 삶을 사는 대인이거나, 이 시대에 가장 유망한 직업인 프리랜서 화백(화려한 백수)이겠지만. 너무나 익숙한 자신의 방 침대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버린 청년은 참으로 불쌍하다.
새벽 기차를 놓치면 직장상사인 지배인이 곧 집으로 들이닥칠 텐데. 그런 일로 가족들을 실망시킬 수 없는 건실한 청년 그레고르, 그는 앞으로 5.6년만 꾹 참고 회사에 더 다니면 아버지가 사장에게 진 빚을 자신이 다 갚게 되니까(아버지가 무슨 보증을 잘못 섰나?) 새로운 인생을 꾸미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직은 건강하지만 이미 5년 전부터 일손을 놓은 노인이 되었고, 천식이 심한 어머니는 숨 쉬는 일조차 힘들어 가정부가 와서 살림을 하고, 어린 여동생은 예쁘게 치장하고 바이올린이나 켜면서 실컷 잠이나 자고 가끔은 살림도 돕는 한량 아가씨인데 과연 그가 아니면 누가 나가서 돈을 벌어온단 말인가? 이 부조리하게 생겨먹은 ‘집구석’ 사정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와 더불어 대표적인 부조리 작가로 명망 있는 카프카가 작정을 하고 비틀어버린 가상현실이지만 정말 대책이 없는 가족들이다.
어두운 소파 밑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감추며 수치와 고독의 나날을 보내던 그레고르는 가끔씩 본의 아니게 식구들에게 들켜서 소동을 일으킨다. 불쌍한 내 아들에게 가게 해달라고 울부짖던 어머니마저도 벌레 아들을 보고 실신해 버린다. “내보내야 해요.” 이제 가족들의 결단만 남았다.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 믿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에요.” 이럴 때 비장해질 수 있는 건 아무래도 한 다리 건너인 여동생이다. “만약 이게 오빠였다면, 사람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자기 발로 떠났을 테지요. 그랬더라면 오빠는 없더라도 계속 살아가며 명예롭게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 동물은 우리를 박해하고, 하숙인들을 쫓아내고, 분명 집을 독차지하여 우리로 하여금 골목길에서 밤을 지새게 하려는 거예요.” 그래, 이건 충분히 말이 되는 소리다. 늘 예쁘장하게 제 몸이나 가꾸는 어린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정말 똑! 소리가 난다. 언제나 ‘젊은 것’들의 설득의 논리란 나름 정의롭고, 윤리와 현명함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도 있다. 인간에 대한 최대의 욕이다. 그녀의 오빠가 사람이라면 정말 그럴 수는 없는 거다! 가족들의 고통도 모르는 벌레는 어차피 처단당해야 한다. 역시나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의 역할은 중요하다. 식탁에 놓인 사과를 집어든 아버지가 벌레를 겨냥하여 던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사과 폭탄세례를 피하지 못하고 등에 사과 한 알이 박힌 채로 몸을 질질 끌고 나가는 그레고르 청년에게 구원의 손길은 없다.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 달려가 껴안으면서 목숨을 보존해달라고 빌어야만 했다.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것은 결코 그 야수성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삶의 막막함, 출구 없는 절망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서라는, 역자(전영애)의 작품 해설에 귀를 기울이면 그나마 그레고르를 향한 연민의 통증이 조금 진정된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건만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서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은 상처가 썩어 죽어가는 청년의 삶은 참혹하다.
가정부가 빗자루로 찔러보다가 벌레가 드디어 죽었다고 소리치며 주인내외에게 보고하자, 그의 아버지가 신에게 감사하며 성호를 긋는다. 비로소 그레고르 집안은 평화를 찾았다. 앞날이 구만리 장천 같은 청년을 제물로 바치고서야 구원을 얻었으니, 어쨌든 카프카는 지독한 작가다.
그 뒤로 그레고르네 가족들은 여행을 떠난다. 하나 남은 딸의 장래를 위한 희망을 다시 품고서. 이제 여동생의 혼삿길을 막는 방해자는 없으니까. 그래, 오빠는 잊자. 사람도 아니었는데, 뭘. 훌훌 다 털어버리고 부디 즐거운 여행길 되시라!
황영경교수의 문화 오딧세이 ‘책이 있는 풍경’
황영경 교수/신흥대 문예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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