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모산성 집수지에서 목부재 및 목기 출토
대모산성 집수지에서 목부재 및 목기 출토
양주 시청 앞에서 유양동 98번 도로를 타고 백석읍 방성리로 넘어가는 좌측에 높이 212.9m의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이곳이 ‘대모산성’이다. 데뫼식 산성으로 백제 근초고왕 때 쌓여진 성으로 알려졌으나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城)이라 추측된다.
이유는 백제초기에 쌍현성으로 추정되기 때문인데 지정학적으로 양주 어둔리에서 복지리로 넘어오는 고개와 유향리에서 방성리로 향하는 고개 사이 성으로, 그 위치가 대략 쌍현성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 성은 비록 나지막 하지만 정면으로 수락산이 보이고 천보산과 국도 3호선 경계가 시원하게 보이며 배후지에는 군량미 조달이 용이한 광적, 백석의 넓은 벌판이 있기에 군사요충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이 성(城)을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 내 가장 강한 나라가 됐다. 고구려가 이 성을 차지할 때 이름은 ‘대모산성’이라고 고구려식 이름이 붙였고, 신라 진흥왕이 성을 차지할 때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676년 나당 전쟁 때 당나라군을 최후로 물리친 매초성 전투에서 대모산성이 본부로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 때 이름은 ‘목판산성’ 조선시대에는 양주 지명을 딴 ‘양주산성’으로 이름했다. 그동안 7차례 발굴로 백제,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골고루 출토된 것으로 보아 지배자와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으나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우리 곁에 우뚝 서 있다.
대모산성 집수지에서 목부재 및 목기 출토
이곳 대모산성에서 최근 낭보가 전해졌다. 산성 내 집수지(용수/用水 확보 및 식수/食水 보관 등을 위한 목적으로 축조한 시설물)에서 낙죽(烙竹)기법(대나무 혹은 나무에 인두를 지져서 무늬ㆍ그림ㆍ글씨를 새기는 방법)으로 글자가 새겨진 목부재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목기 유물이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됐다.
양주 대모산성 종합정비사업 일환으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재)기호문화재연구원이 진행하는 제10차 발굴조사는 양주 대모산 정상부에 위치한 ‘양주 대모산성’의 집수지, 성벽의 축조기법과 구조 등을 파악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집수지와 성벽 등을 비롯해 집수지 하단부에서 출토된 유물 중 목부재 1점에서 낙죽기법으로 새겨진 글자가 확인됐다. 목부재 표면에 새겨진 글자는 세로 방향으로 2열이 남아있으나 훼손이 심해 글자의 내용은 판독하기 어려웠다.
현재까지 고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목제유물 중 글자가 확인되는 경우는 목간(木簡)이 가장 많으며 기록 방식은 묵서(墨書)가 대부분으로 목간이 아닌 목제품에서 글자가 확인되거나, 묵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글자가 기록된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또, 대모산성 집수지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목부재 외에도 나무 숟가락, 목제 그릇, 도구형 목기 등이 출토됐다. 조사단은 외부 공기 노출을 최소화해야 하는 목기류 유물이 수습과정에서 훼손될 것을 우려, 발굴현장에서 즉각적인 응급 보존조치를 실시했다. 집수지의 최하단부는 기와, 점토, 석재, 목기 등이 채워져 있는 양상으로, 수습된 유물의 복원 과정에서 완형의 개체를 이루는 기와가 확인되는 특징을 보였다. 자연적인 폐기 과정에서 완형을 이루는 유물 개체가 확인되기 어려운 만큼 집수지 최하단부에서 출토된 목기와 기와는 석재, 점토와 함께 의도성을 갖고 매납(埋納,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유물을 의도적으로 묻는 것)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산성 내 수원확보와 관련한 공헌(貢獻, 공물/貢物을 바침)의 행위로 추정 된다.
양주시는 출토된 여러 형태의 목기류 유물들에 대한 고고학적,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하고 다른 유적 출토품과 비교검토를 통해 목기류의 명확한 기능과 성격을 확인할 계획이다. 특히 낙죽기법으로 글자가 새겨진 방식은 경주 안압지 출토 목간 외에 기조사 사례가 매우 드물어 고대 문자를 연구함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성주, 하대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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