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와 평등의 독립 국가를 꿈꾼 ‘양주사람 조소앙’
양주시 남면 황방리214-7에 가면 개화기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조소앙 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는 “감악동두 죽엽창창 가할 만인지지”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감악산 동쪽에 대나무 잎이 무성한데 그 땅이 많은 이들에게 복된 땅이 된다는 뜻이다. 이는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함안 조씨 조소앙 집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물 사전에 조소앙 선생(사진)의 고향이 파주라고 나오는데 본적이 만들어지는 일제 때 이곳이 파주 땅 이었다. 본래 정성현 남면이었는데 구한말 파주군에 속했다가 해방 후에는 연천군에 거쳐 1946년 양주로 편입돼 조소앙 선생의 출신은 양주다.
이런 연유로 양주 시민들이 기념관 건립 발의에 불을 붙였고, 정부 지원으로 기념관이 양주에 건립되었다.
함안 조씨 조소앙의 이름은 용은이고 소앙은 호다. 그는 1887년 태어났다. 정3품 통정대부인 성룡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3년 뒤 졸업하고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 동경부립1중학, 명치대 법학부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성균관 유생시절 단재 신채호와 함께 매국노 이하영의 성토문을 뿌렸고, 1912년 대학졸업 후 귀국, 양정, 경신, 대동법률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했다. 3.1 운동 전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39인 공동서명으로 발표하고 그해 대한독립 의금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이 되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열사는 그가 보냈으며 임시정부 수립에 즈음에서는 헌법, 의정원 법을 기초하고 심사위원을 했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국체와 정체의 기틀이 그의 손에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조선의 독립운동이 왕정복고가 아니라 대한 사람이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엄청난 시대적 흐름을 바꿔놓은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외무부장, 교통부장을 역임했고, 1929년 김구, 안창호,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부위원장이 되면서 유명한 삼균주의를 당 강령으로 확립하였다.
삼균주의는 정치의 균등, 경제의 균등, 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사회주의 색채가 있지만 국민소득 50불도 안 되고, 신민 치하에서 국민 모두가 최단기간에 혜택이 돌아가는 방법은 그 시대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일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성공적인 개혁이라고 평가받는 사회보장제도나 건강의료보험제도는 선생의 삼균주의가 근간이 되었다.

김구 주석으로부터 받은 외무부장(외무장관) 임명장
정치적으로는 김구 선생과 함께 조국 통일을 위해 평양에 다녀왔고, 1950년 2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됐다. 그러나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북한으로 납북되었으며, 1958년 쯤 북한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양주에 있는 선생의 묘는 의묘이고, 부인 묘가 부좌되어 있다.
글/ 본고는 김성수 전 국회의원의 미공개 양주문화기행2에서 발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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