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은 우리 민족의 애환이 살아 숨쉬는 곳
두만강은 우리 민족의 애환이 살아 숨쉬는 곳
중국시내에 커피전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위), 리모델링이 한창인 도문역(아래)
한민족의 성산 - 백두산을 오르다(마지막회)
“두만강으로 생명을 걸고 넘어온다니 눈물이 난다”
봉오산 전적지는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장군이 일본군 대대병력을 섬멸해 독립운동사에 청산리 전투와 버금가는 독립무장투쟁의 현장인 곳이다. 옷깃을 여미며 한글로 된 기념비 앞에 잠시 묵념했다. 마음 한 구석이 짠해 지면서 독립국가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선조들의 헌신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한국의 많은 젊은 청소년들이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런 역사적 현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기대를 안고 도문 시내로 향했다.
도문시는 연길시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있으며 두만강 중류에 위치해 있다. 연변에서 유일하게 두만강과 붙은 도시다. 도문은 남으로 두만강을 사이 두고 북한의 남양시와 마주하고 북으로는 연변과 흑룡강성과 맞대고 있다. 현재 연변 각지와 장춘, 심양, 북경, 모단강 등으로 통하는 열차는 도문이 시발점이다. 북한과는 하루에 한 번씩 정기열차가 오가고 있어 북한과의 교역에 숨통을 터주는 곳이다. 나는 도문역으로 갔다. 그러나 도문역은 리모델링이 한창으로 일부는 통제하고, 일부는 개방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오가는 열차라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접근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북한열차가 하루에 1번씩 승객과 북한의 임산물, 광산물 등을 실고 들어오고, 밀가루, 옥수수 등 농산물을 다시 실고 북으로 들어간다고 귀띔해 준다. 연길로 돌아가는 길에 정 반대 방향으로 훈춘시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넘어 북한의 나진시(160km)인데, 중국이 동해 진출을 위해 북한에 집요하게 조차를 강요 했던 곳이고, 의정부에서 출발 했던 경원선이 원산, 함흥을 거쳐 이곳에서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만나는 기점이기에 가보고 싶지만 갈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며 연길로 돌아왔다.
연길은 한국에서 유행하면 바로 연길에서도 유행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커피숍 바람이 불었는데 연길 여기저기에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커피전문점에는 젊은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우리와 비슷하다. 내가 10년 전에 연길을 왔을 때하고는 상당히 발전되고 세련되어 있었다. 버섯전문 도매상을 찾았다. 7월말인데도 송이버섯이 나오기 시작한다며 새 송이버섯을 구경시켜 준다. 능이버섯을 찾으니 능이가 아니라 향이버섯 또는 호랑이 발톱처럼 생겼다 해서 호랑이발톱버섯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장뇌삼 판매점 등 시장 이곳저곳을 다니며 저녁을 맞이했다. 허기도 달래고, 연길에서 마지막 밤을 즐기기 위해 연길에서는 유명하다는 양꼬치를 파는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어묵처럼 긴 막대기에 양고기를 꽂아 숯불에 구어 먹는데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우리는 칭다오맥주잔을 계속 돌리며 면서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오전 10시, 인천으로 가는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기위해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내가 처음 왔을 때와 같이 떠들썩하고 들기 힘들 것 같은 큰 짐을 여자가 거뜬히 들고 바삐 움직이며 누구엔가 소리친다. 지금 중국은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모두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북한은 조용하기만 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은 천지차이를 실감한다. 어제 본 두만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넘어온다니 그들의 곤고한 삶의 여정에 눈물이 난다. 우리는 언제쯤 북한을 자유롭게 가고, 생동감 넘치는 북한주민들을 볼지 무거운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끝 글/ 현성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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