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후 10년 만에 붕괴한다던 북한, 지금은?
2011년 12월 20일 북한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고(故)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 모습
김일성 사후 10년 만에 붕괴한다던 북한, 지금은?
본고는 이재봉교수가 남북평화재단에 기고한 글을 발췌 것이다.(편집자 주)
1994년 8월 유학을 마치고 9월부터 경상도의 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 맡은 과목은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강좌. 담당 강사가 있었는데 수강 신청자가 넘쳐 학급을 둘로 나누는 바람에 한 강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수강 신청이 폭주한 배경은 7월의 김일성 사망이었다. 북한을 50년간 통치해온 그가 죽었으니 머지않아 북한이 무너질 텐데 통일에 대비해 북한을 공부하자는 것.
미국 유학 10년 동안 미국정치와 국제관계 등의 분야를 주로 공부하면서 한미관계에 대해 학위논문을 쓴 터라, 북한 관련 수업을 맡기 어렵다고 주임교수에게 말했더니 그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한국인이 정치학을 전공하면 북한 연구는 기본이지요." 한국인 정치학자의 기본을 갖추면서 먹고 살기 위해 북한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수업 첫날 설렘과 긴장을 달래며 200여 명의 학생들 앞에 섰다. 먼저 담당 강사가 바뀐 점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대타(代打)가 홈런 친다"는 한 학생의 격려에 "홈런은 못 치더라도 안타는 날리겠다"고 대꾸했다. 그리고 북한에 관한 무식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강의 준비에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했다. 도서관과 서점을 뒤져 북한 관련 책을 싹쓸이하다시피 구해 밤을 밝히며 읽어나갔다. 다음 학기엔 내 이름으로 개설된 강좌에도 수백 명이 몰렸다. 내 강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김일성 사망과 북한 붕괴 가능성이 북한 공부에 대한 특수(特需)를 불러온 것이다.
1996년 3월부터 원광대학교에 교수로 자리 잡으면서도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강좌를 맡게 되었다. 고참 교수로부터 물려받은 과목인데 여기서도 수강생이 넘쳐 다음 학기엔 강좌 수도 늘리고 야간강좌까지 개설했다. 1995~96년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 식량난 때문에 곧 폭동이 일어나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커진 덕분이었다.
그 무렵 북한 전문가들은 여기저기서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6년의 한 정치학회에서는 "북한이 지금 붕괴되고 있는 중"이라며 "빠르면 3년 늦어도 10년 안에 남쪽에 의한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발표가 나왔다. 통일부 산하 민족통일연구원은 1996년 펴낸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위기 수준 평가 및 내구력 전망>이라는 연구보고서에서, 2001~2008년 사이에 북한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도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국제적인 경제협력 관계가 미약하며, 식량과 유류 등 안보자원을 원활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붕괴 요인으로 들면서. 1997년 2월 황장엽 조선로동당 비서가 북한을 탈출하자 '북한 붕괴론'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에서는 당선자가 첫 통일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전망을 쏟아냈고, 후보자 토론회에서는 "북한이 붕괴되어 통일되면 북한 지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난 북한 붕괴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북한에 대해 겨우 2~3년 공부한 초보자가 전문가들에게 대드는 꼴이었다. 북한 관련 학회엔 중앙정보부 후신이요 국가정보원 전신인 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가끔 참석해 나더러 학생운동권 출신이냐고 물으며 왜 그렇게 친북적인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는지 시비를 걸기도 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엔 한 여학생이 걱정스레 물었다. "교수님, 학계나 언론계 모두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교수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붕괴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럼 교수 그만둬야죠." 그렇게 객기를 부린지 20년 가까이 흘렀는데 아직 가난한 친북학자의 밥줄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 대답 때문에 정년퇴임 전에 옷 벗을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다.
1998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일주일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험한 꼴을 많이 보았다. "북한 경제가 바닥을 쳤다"는 말이 나돌 만큼 몹시 어려운 때였다. 추석날조차 평양 시내를 거니는 사람들의 행색이 너무 초라했다. 황해북도 사리원의 한 육아원에선 방마다 그야말로 산송장처럼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이 누워있었다. 평양을 떠나며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북한 붕괴는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왔는데, 이렇게 기본적으로 먹고살기조차 힘들다면 차라리 무너지는 게 좋지 않을까. 남쪽 사람들 눈칫밥이라도 얻어먹으며 살아남는 게 굶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남쪽에 돌아온 뒤에도 북한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빼거나 고쳐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해외의 친북 교수들에게까지 자문을 구하면서. 마침 조선족 유학생이던 작가 장영철이 1997년 펴낸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라는 책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으리라고. 연변에서 온 동포 직업연수생들이 남한에서 얼마나 차별받고 멸시 당했으면 집으로 돌아가며 "만약 전쟁이 다시 한 번 난다면 총을 들고 선참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놈들을 쏴 죽이겠다"는 악담을 퍼부었겠는가.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겠다며 고국 땅을 밟았던 사람들이 그 정도라면, 떼거리로 내려와 빌어먹을 북쪽 사람들이 남쪽의 잘난 사람들에게 어떠한 대접을 받을 것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북한 붕괴론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북한 붕괴를 기대하거나 겨냥하면서 대북정책을 세우는 것 같다. 대통령이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며 통일 기금을 조성하자고 하거나, 국민이 통일되면 사회혼란이 일어나고 천문학적인 경비가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 북한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북한 붕괴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주장을 199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중략)
<북한 붕괴, 바람직하지도 않다>
앞에서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드러냈는데, 만약 붕괴되더라도 남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북한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대강 얘기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한다.
첫째, 북한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면 중국이 가장 먼저 들어갈 것이다. 약 1500km의 국경을 마주하며 북한 구석구석에 엄청난 투자를 해놓고 있는 터에, 중국과 북한은 전통적으로 '이와 입술의 관계 (脣齒關係)'임을 주장하며 개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말이다. 북한이 무너지면 미군이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선까지 올라가 주둔하기 쉬운데 중국이 이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과거엔 정부를 세운 지 1년도 되지 않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왔으며, 지금은 미국의 견제와 포위 정책에 맞닥뜨린 중국이다.
둘째, 북한이 붕괴될 조짐이 보이면 미국이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북한 핵무기의 안전한 관리를 이유로 유엔을 앞세우거나 단독으로 북한을 점령하겠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남한과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을 가동해 북한을 점령하려 할 수도 있고. 아무튼 남한은 헌법에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지만, 북한은 유엔에 가입한 국제법상 엄연한 독립국이다.
셋째, 북한이 위기에 처하면 군부 강경파의 결사항전에 따라 제2의 한국전쟁 또는 최소한 게릴라투쟁이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한 지도자들이 통일 되면 북한 통치자들에게 응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마당에, 100만이 넘는 병력과 첨단무기를 가지고 있는 북한 지배층이 남한에 순순히 투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넷째,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북한이 남한에 고이 접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붕괴가 외세의 개입이나 무력충돌 없이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남한은 혼란을 수습하고 탈북자들을 껴안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부족하다. 2014년 현재 2만 명 남짓의 탈북자 가운데 약 80%가 극심한 빈곤으로 정부의 기초생활 보호를 받고 있는 데다, 남쪽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냉대 때문에 심리적 고통을 더 심하게 겪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엔 남쪽 생활에 큰 불만을 품고 캐나다나 호주 등 다른 나라로의 이민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고, 합법적으로 북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렇게 2만여 명의 탈북자도 제대로 껴안지 못하는 터에 북한이 붕괴되면 생길 2천만여 명의 ‘빌어먹을 사람들’을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북한 붕괴론에 관한 제안>
북한 붕괴론은 북한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에 의해 나오기보다는 북한 체제나 지도자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개심에서 제기된 경향이 크다. 예측이 아니라 희망사항이란 뜻이다. 북한 붕괴가 바람직한 결과를 불러올 것 같다면 가능성이 낮아도 붕괴를 유도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정책을 세우는 게 좋고, 반대로 붕괴의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으면 가능성이 높아도 붕괴를 막거나 늦출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게 좋다.
물론 단 1%의 가능성이 실현될 수도 있고 99%의 가능성도 실현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의 붕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대책을 세워놓아야 한다. 중국이나 미국 등 외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전쟁을 피하며, 사회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하며, 북한 주민들이 중국보다 남한을 선호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실익도 없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도록 반드시 은밀하게.>
남한 당국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을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북한을 자극할 뿐 오히려 통일을 방해하는 악수(惡手)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한 정책을 세워놓고 이를 널리 알림으로써 북한의 도발을 부추기는 것도 반드시 피해야 한다. 북한이 붕괴되어 궁극적으로 흡수되면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 아닌가. 안보나 통일은 우리의 궁극 목표가 아니라 남북한이 더불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재봉 교수(원광대 평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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