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과 ‘나쁜’을 불사르는 촛불잔치
최송림의 이야기 정거장
‘배신’과 ‘나쁜’을 불사르는 촛불잔치
지난 12일 백만 명 넘게 모여 광화문 세종대로를 가득 밝힌 촛불집회는 그야말로 시민 문화축제, 촛불잔치였다. 경향각지에서 모여든 남녀노소 국민들이 하나로 뭉쳐 페스티벌, 축제를 즐기듯 목이 터져라 대통령 하야를 부르짖었다. 미상불 민중의 힘이 무엇인가를 실감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라는데, 우리네 전쟁둥이 세대가 젊은 시절 겪었던 데모의 날들은 군사정부가 물러가고 민주화된 뒤 두 번 다시 이 땅에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악성 ‘DNA’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력시위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마무리 됐다는, 놀랍도록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시민이나 경찰이나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대한민국에 어떤 못된 체제의 정부가 들어서서 국민을 탄압하고 국정을 농단하더라도 단호히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가 참말로 눈부시다. 국민은 온갖 시련 속에 지켜낸 민주국가의 주인으로서 자격이 충분한데, 정치인이 영 못 미친다는 게 우리네 불행이요 슬픔이라고 한탄하는 시민의 목소리가 촛불처럼 뜨겁다. ‘제 몸을 사루어 빛을 밝히는 촛불 같은 사랑이어라!’ 필자가 지인의 결혼식 때마다 축의금 봉투에 쓰는 고정문구다. 그야말로 촛불처럼 제 몸을 사루어 빛을 밝히고 어둠을 쫓아내 민주주의 꽃을 활짝 피우는 촛불잔치는 나라사랑 바로 그것이 아닐까?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시민은 거리뿐만 아니었다. 필자는 비교적 자발적으로 참여한 순수 시민시위대 꽁무니쯤인 파고다 공원 뒷골목 시래기 국밥집을 찾았다. 모르면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최고 싼 집이 아닐까 싶은, 2천 원짜리 식당이다. 필자는 가끔 드나들 때마다 국가나 서울시가 할 일을 집주인이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고마워한다. 국밥뿐 아니라, 막걸리도 2천원, 소주도 2천원이다.
요컨대 일금 4천이면 배고픔과 술고픔을 동시에 해결하는 서민들의 민생해방구다. 해방구민들의 술잔 주변엔 <박근혜 퇴진><박근혜 하야><최순실 꼭두각시 박근혜> 같은 전단들이 반찬이나 안주거리처럼 자유롭게 놓여 있었다. 아마도 시위에 참가하고 배가 출출하여 국밥집으로 온 듯하다. 나도 깍두기까지 몽땅 쓸어 담은 국밥을 안주삼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작가의 귀’로 들어봤다.
박대통령하면 부모를 총탄에 잃어 국민적인 동정심마저 바탕에 깔고 한때 쓰러져가는 소속 당을 천막당사로 일으켜 세웠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부녀 대통령, 친박 등 수많은 측근에 휩싸인 현역 대통령이다.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최순실 일반인에게 그토록 사로잡혔느냐는 것이다. 무슨 치명적이고 운명적인 약점이 있길래, 생각할수록 자존심 상하고 황당하다는 중론이다.
우리가 이러려고 대통령 뽑았나, 한마디로 자기네 손으로 뽑은 대통령에게 배신당했다는 국민적 분노다. 누군가의 쪽 팔린다는 맞장구가 마음속에 공명을 일으킨다. “국가가 무슨 구멍가게냐!” 중년의 취객은 혀 구부러진 소리로 “그녀가 대통령 출마하면 내가 나가도 된다 생각했다. 야당 후보가 얼마나 못났으면…” 이 지경까지 된 모든 원인제공의 화살을 야당 지도자에게 돌리기도 한다.
지금도 시민혁명으로 박대통령이 물러나면 야당 유력정치인들은 불난 집에 제 밥그릇 챙길 궁리만 한다는 일침을 놓았다. 아울러 박대통령을 뽑은 우리 국민도 그 책임을 면치 못한다는 젊은이의 목소리도 만만찮았다. 막장에 몰려 박대통령이 행여 잘 못되면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다는 중년여성의 주장도 나왔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소설이나 연극, 영화, TV 드라마 등 문예작품의 소재와 작품 속 주인공으로서 말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필자는 오늘의 현주소 스케치를 마감하려는데 여태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뽑아준 국민을 배신한 참 나쁜 대통령”이라며 무엇보다도 “그 따위 장삼이사에게 국정농간을 당하다니!” 바닥을 밑도는 5% 지지율까지 들먹이며 국민탄핵이라 투덜대듯 막잔을 비우고 입술을 쓱 닦는 젊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배신’과 ‘나쁜’은 누군가의 전매특허 같은 말인데 부메랑이 된 것이다.
첫눈에 ‘진실’해 보이는 저 보통서민은 스스로 ‘지공거사’라고 공허하게 웃으며 푸르른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를 흔들어 보이고 지하철을 찾아 서둘러 나가면서 주술처럼 뇌였다. “이게 나라냐! 국민은 누구나 법대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때마침 청와대 앞 광화문 쪽에서 시위대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 시간까지 남아 시위하는 투사도, 언제든 자기 스케줄에 맞춰 귀가하는 자유로운 영혼도 평화시위 문화를 활짝 꽃 피웠다는 여론이다. 이 새로운 질서의 시민축제 촛불잔치가 혼탁한 정치판을 정화시키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희망 찬 가슴이 막 쿵쾅거린다. 글/ 최송림(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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