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훈 作 '부산상회(釜山商會)1'
북경기신문 창간 11주년 기념 ‘방영훈 미공개 소설’ 연재
방영훈 作 '부산상회(釜山商會)1'
북경기신문은 창간 11주년(2006년 3월 1일) 기념으로 본지 방영훈 이사장(전 한국일보 기자)의 미발표 신작소설 ‘부산상회’ 중 ‘자유시장’ ‘마녀사냥’ ‘수국애상(水菊哀想)’ ‘곡마단의 추억’을 6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최근 부산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 철거와 관련하여 한-일간 첨예한 대립이 증폭하는 가운데 우리시대의 아픔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본 이야기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날로부터 1965년 월남파병까지의 20여 년간 우리 민족과 사회가 당면했던 일들로, 주 무대는 ‘부산상회(釜山商會)’다.(편집자 주)
<부산상회>는 상회 주인 방성일씨가 해방, 전쟁, 혁명을 거치는 동안 급속도로 팽창하는 부산의 경제, 정치, 사회상을 그의 가족 그리고 그와 연대하거나 경쟁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펼치는 이야기이다. 부산 최대 상권지대인 남포동, 광복동 그리고 부두, 부산상회는 실재장소와 때로 실존인물들을 배경으로 총 5부로 구성되어있다. 본지에서는 창간 11돌을 맞아 <부산상회>를 지면신문과 인터넷판(www.bkknews.kr)에 연재할 예정이며 향후 출판 및 TV영화로 제작할 계획이다.
작가 방영훈(方永勳)은 부산 태생으로 중앙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기자로 24년 재직하였으며 현재 동두천영상단지를 조성중인 한편, 본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가 말한다. “나는 부산서 태어나고 자랐다. 자갈치 시장 초입, 선구점(船具店)을 했던 우리 집에는 여객선과 상선, 어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나가면서 어구만큼 풍부한 이야기들로 넘쳐났다. 이러한 얘기들을 나도 하고 싶었다. 누군가로부터 듣고 어디 선가로부터 들었던 수많은 스토리들. 그 가운데 부산이 있었고 바다와 사람과 바람과 꽃이 있었다. 물자가 귀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가운데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던 사람들. 그들의 삶과 노력을 통해 오늘을 조명하고자 한다.”
<자유시장>
도떼기시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낮 땡볕이 슬며시 가라앉을 오후 5시경, 도떼기시장 앞 신작로에 한 아낙이 소리를 뽑아내는 걸 보려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여들었다. 나이 스물서너살 쯤 됐을까. 하얀 피부에 호리낭창한 몸매가 아니라면 눈여겨볼 미인도 아니었다. 치장을 한 것도 아니었고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에 쪽 진 머리가 전부였다.
노래 가락을 뽑을 때는 민요에서부터 유행가까지 여러 곡을 부르는데 그닥(그다지) 훌륭한 소리꾼이 아님에도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는 그녀의 머리에 두른 오색실을 꼬아 만든 실타래 때문 인듯하였다. 여자가 목청을 돋우면 어깨가 덜썩거리고 그때마다 짧은 저고리 섶이 올라가면서 배꼽언저리가 살짝 드러난다. 그러면 곁에 앉은 소녀아이가 소북을 치며 신명을 올리는데 그 표정이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마실이라 했다. 마실의 딸인 듯 한 여자아이의 이름은 호박. 그들 모녀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부산으로 흘러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포 전 우연히 시장 앞에 난전을 펴더니 소리를 치고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 ‘한 곡 더 뽑아라’ ‘그년 창가 한번 잘 한다’ 며 슬슬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노래에 흥이 실리면 사람들은 박수를 치거나 동전을 던졌다. 호박은 그때마다 땅에 떨어진 동전을 주웠고 때로 떡이나 과자를 주는 사람들도 있어 그저 받을 뿐이었다. 이들 모녀가 어디서 잠을 자는지 또 어디서 씻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사람들 사이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 애를 낳아 돌아온 여자’라느니 ‘그래서 약간 실성한 여자 같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고갔다.
도떼기시장 앞 신작로 건너는 ‘깡통시장’이다. 미군정치가 시작되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통조림이나 담배 술 따위를 파는 가게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뒤편 ‘보수시장’ 길을 막을 만큼 많은 가게가 들어서자 자연 ‘깡통시장’으로 불리워지게 됐다. 이곳서 구하지 못할 미군 물건은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군인들의 군용담요에서 치약 칫솔, 껌과 비스켓 초콜릿, 그리고 군용점퍼와 비옷까지.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이 분유를 담은 깡통과 과일 통조림 등 이었다. 과일은 제철 나오는 과실들을 먹던 사람들이 한 겨울에도 복숭아나 파인애플, 귤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신기했던지 생각보다 많이 팔려나갔다.
도떼기시장 앞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방 전부터 가게를 열었던 사람들은 일본식 적선가옥을 고쳐 포목이나 옹기, 곡물과 설탕, 차, 그리고 살림살이에 필요한 가정용품들을 주로 팔았지만 징용 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진을 치면서 여자들 반딧고리서 부터 노리개, 사진첩과 각종 가방과 배낭, 어항, 유단보, 화로에 부싯갱이 심지어 술을 담글 누룩과 꿀, 각종 과실주에 갓과 돋보기안경, 지팡이, 파리채등 별의별 물건들이 다 나와 있었다.
이들 앞에는 지게꾼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수레로 짐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까지 가세, 오전 10시경서부터 저녁 무렵까지 시장 통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보수시장’은 왜정시대 때부터 여염집의 식단에 오를 각종 채소와 찬거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천정은 크고 검은 망으로 가렸고 실내는 찬가게들 외에도 김밥 우동 파전에 막걸리 집, 그리고 팥죽을 쑤어 파는 할머니에서 돼지 머리고기나 순대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한켠을 차지하고 손님들을 불러 모았다. 특히 이곳의 팥죽과 가락국수, 비빔국수가 인기가 많았다. 멸치 다신 물에 주는 가락국수도 그러하지만 된장과 고추장을 적당히 버무려 장으로 맛을 내는 비빔국수는 일미였다.
마실이 등장하고 도떼기시장은 구경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 됐다.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이 마실의 공연시간을 기다리게 됐고 한 시간여 목청을 다듬었던 마실은 공연이 끝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나타나 한두 시간 이리저리 상점들 사이 마실을 돌다간, 제 자리로 돌아와 목청을 돋우는 것이었다. 그녀의 노래가 끝내면 사람들은 그제 서야 흩어진다.
그런데 소녀아이 호박의 태도가 수상했다. 사람들이 마실을 가리켜 “네 어미냐” 하고 물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아니라고 한다. “그럼 누구냐” 하고 물으면 “몰라요”하고 답해 그때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꼬마가 농지거리를 한다고 생각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 돌아갈 때 즈음이면 혹여 마실을 놓칠세라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이나 그런 소녀의 등이나 머리를 쓰다듬는 마실의 모습은 영락없이 제 어미가 하는 양과 같아 아무도 두 사람을 모녀라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이날따라 날이 무더웠다. 모녀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그늘을 찾는 듯 보수시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순대 파는 가게로 다가왔지만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때 꾀죄죄한 남자 한 명이 자리를 좁혀 앉으며 자리를 내주었고 마실은 그를 흘낏 한번 보더니 호박과 제 옆자리를 나누어 앉았다. “머리고기 조금 파세요” 마실이 음식 주문을 하는 사이 남자는 수육을 안주삼아 조용히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마실이 말을 건넸다. “나도 한잔 주셔요” 순간 남자의 얼굴이 벌개 졌다. 수줍음 탓이었다. 약간 대머리가 진 그는 나이에 비해 늙어보였고 배가 앞으로 나온 배불뚝이였다. 마실이 거침없이 한잔을 비워내곤 다시 잔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었다. 두 번째 잔도 말끔히 비운 그녀가 남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참 착하게 생기셨네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옥을 굴리듯 찰랑찰랑 거린다. 남자는 그제 서야 얼굴을 펴며...........(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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