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의정부를 떠난 이유
무세중(통일예술가)이 전하는 ‘회고와 당부’
내가 의정부를 떠난 이유
필자가 독일에서 8여 년 동안 연극 활동을 하다가 들어온 이유는 나의 연극 활동이 그들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비극을 초래해 놓고 그들의 우쭐대는 유사 제국주의 꼬락서니를 통렬히 비난했던 필자의 극단‘TEATROMU’는 30여명의 단원이 모두 독일인 이였기에 그들에게는 동양인인 내가 작품을 쓰고 연출하는 행위가 지극히 거슬렸던 셈이다.
별별 구실을 다잡아 체류 허가를 안내주는 것은 물론 추방 명령까지 받았기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여 한국행을 결심 하였지만 우리 조국 한국은 무참히 짓밟힌 광주 민주화 봉기로 어지러울 때였고 가난한 예술가인 내가 집을 얻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기야 가진 게 원래 없는 나였지만 아내 무나미가 있어 1984년 당시 5백만 원으로 쌍문동 꽃동네 산꼭대기에 기거했다. 마침 한양대학교 강사를 맡게 되었는데 쌍문동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학교가 가까운 사당동으로 6백만원의 전세를 얻고 옮겨 가게 되었다. 해마다 집세는 매년 올라 2번 이사를 하였다.
그러다가 YMCA 더벅머리 청년 현성주씨를 만났고 주거비가 싼 의정부로 오는 게 어떠냐고 해서 의정부행을 결정하였다. 한국 연극 최초의 석사 1호였던 나의 논문이 양주 별산대 놀이연구 이였기에 양주가 가까운 의정부는 한국 연극 발자취를 찾는데 주요한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가능여고 후문 쪽 기찻길 옆에 방 3개가 딸린 900만 원 짜리 전셋집을 구해 연로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옮겨갔다. 마당이 없는 다세대 주택이었기에 나는 주로 옥상에서 지내야 했지만 북한산 북쪽 능선과 넓은 논과 불곡산을 바라보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나는 9형제의 장남으로 집안의 제사를 지내야 할 몸이었고, 서울과 떨어진 외곽 의정부의 비좁고 허술한 이층 안방이지만 정성껏 제사를 지내며 이제야 정착해서 살겠구나 싶었다. 당시에 내가 한 일은 의정부가 전쟁의 상흔이 가장 깊었던 곳이고 나 역시 군복무를 동두천 7사단에서 마친 경험이 있고 해서 의정부가 통일 문화의 센터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의정부 통일 예술제’를 발기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주었다.
도대체 의정부는 어떤 도시인가? 가운데가 잘려 나가서 동서가 분열되고 북한산도 서울 쪽에 동서가 갈려 중심축이 없는 상황에서 의정부 신도시가 건설 되었다. 조선시대 관 조직으로 남은 의정부라는 이름은 과거에 묶이고 발전 또는 미래 상황에 대처하는 힘을 잃은 채 과거 전쟁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서울 외곽의 향락 도시로 전락해 감에 분노를 감 출 수 없었던 나는, 분단으로 인한 겨레의 아픔을 통일 문화로 승화해야한다고 믿으며 통일 예술제를 만들어낸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의정부는 곧 다가올 통일 조국 한민족 한반도의 심장 같은 나라 중심이 될 것으로 확신한 나는 ‘통일을 문화로 풀어나가야 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통일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통일 문화재단으로 승격하여 온 국민의 성토를 꿈꾸었던 장본인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예총을 설득하여 온갖 통일문화 행사를 주관하여 통일예술제를 10여 년 동안 꾸준히 밀어 왔다. 그래서인지 의정부시 문화상도 받았다.
또한 끊임없이 예술의 전당 건립을 촉구하여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의정부에 통일문화 도시로서 회복을 꾀하였지만 “통일이 밥 먹여 주냐” “무슨 놈의 원-코리아냐”는 등 힐난을 받았고, 난데없이 의정부 근방에 살았다는 천상병 시인의 거대한 축제는 열어주면서 정작 의정부의 비극적 전쟁 상흔 회복을 위한 의정부 역사 자체의 문화를 소홀히 하는 상황과 인식들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하였다.
더욱이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듯 2천만원의 전세가 5천만원까지 치솟아 오른 전세 폭탄을 맞았고, 급기야 13년의 정든 의정부 가능1동, 2층 방과 옥상을 떠나야만 했다. 그래도 정든 의정부를 떠나지 않으려 몇 개월 동안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나의 처지와 형편으로는 마땅한 곳 하나 없고 할 수 없이 의정부를 떠나야만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내 몸과 그동안 수없이 올렸던 연극공연 작품들 밖에 없었던 나는 우여곡절 끝에 양주시와 고양시 경계로 옮겨와 북한산 건너편 산기슭 폐허의 땅을 빌려 비닐하우스 움막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아주 다행히 북한산을 바라보며 숨 쉴 수 있는 곳이어서 눈물이 나도록 고맙고 가끔씩은 ‘저 산 너머에는 의정부가 있겠지’하며 살고 있다. 매년 토지세를 마련해내며 어느덧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늘 걱정이 앞서는 것은 이곳이 그리 오래 정착할 곳은 아니라는 상황이다. 모든 전 재산을 비닐하우스 짓는데 써버렸고 주인이 땅을 팔거나 사용하려 할 때는 당장 비닐하우스를 허물어야 된다는 조건이기에 이곳에서 나가면 방한 칸도 마련 할 수 없는 신세가 된 셈이다.
하지만 지금 얼마나 고마운 혜택인가 참으로 한 푼도 건질게 없는 신세지만 그리고 매번 논설을 쓰고도 한 푼의 원고료도 못 받는 가난한 신문사이지만 성실한 현성주 편집국장의 지고한 분투력을 존중하면서 나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이 80세를 넘기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 이게 늙은이의 한탄만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면서 북경기 신문이 통일문화신문이 되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다. 글/ 무세중(통일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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