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침목 놓기’ 운동에 침목을 캔버스로 그 자신의 그림 헌정
‘사랑의 침목 놓기’ 운동에 침목을
캔버스로 그 자신의 그림 헌정
필자의 오랜 벗. 화가 이목일(李木日.65). 그가 고향인 경남 함양으로 낙향한지 어느 덧 7년. 낙향하기 전 경기도 고양시에 화실을 두고 일산서 아내와 오붓하게 살던 그가 돌연 지방으로 내려간 데는 사랑하던 아내와의 이혼에 대한 상처 때문이었다.
가슴의 상처는 다시 몸을 다치게 한다. 풍(風)을 맞은 것이다. 3년여 재활 끝에 다시 붓을 들고 올 4월 전시회를 앞두고 있는 그를 찾아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서 함양까지는 버스길로 3시간 30여분. 날은 포근했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지방도로로 진입하자 산이 막아선다. 소백산맥 지류인 덕유산과 지리산을 끼고 마침내 버스가 닿았을 때 오후 5시30분경. 그는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고장인 것 같다.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의 도시 아닌가.
“사방이 산일세. 병풍처럼 말일세. 고향이어서인지 산 탓인지 여자 품에 안긴 느낌이야.” 젊은 시절 그의 화두는 성(性)이었다. 중앙대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일본유학을 마친 그가 생뚱맞게도 성을 주제로 한 판화그림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비구상이었으나 색채가 뚜렷했고 내면 깊숙이 숨겨진 가면이 벗긴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랑의 침목 놓기’ 운동에 침목을 캔버스로 그 자신의 그림 헌정
⦁당시 마광수교수를 비롯해 문화계 사람들과 연대하여 검열문화에 도전하지 않았나.
“성이 자유롭지 못한 시대는 암흑기일세. 우리 민족은 언젠가부터 윤리의 틀, 식민지의 틀, 독재의 틀에 갇혀 본능조차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지. 자연 성은 지하 또는 변두리 문화로 전략해 버렸어. 정신적으로나 법적으로도 말이야” 지리산 기슭 백송사 주지 원돈스님과 산채나물에다 곡주로 입을 씻은 후 그의 집이자 화실로 들어서자 물감 냄새에 캔버스가 어지러이 널려있다.
⦁평소의 화풍이라면 굵은 선의 구도와 강한 색채감이 아니던가. 색감은 더 강해진 데 반해 꽃과 풀잎들이 문득 애상을 느끼게 하고 있군.
“감정 선이 애잔해졌어. 이곳은 중심에서 5분간 나가면 온통 나무와 물,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과 풀일세. 그들의 강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이 말 할 수 없이 경건한 느낌을 주거든.”
⦁가슴에 피는 불, 무엇으로 끄려는가 했더니 몸은 불편해도 캔버스에는 열정과 애수가 넘치네 그려. “한 1년 전부터 하늘에서 무언가 막 쏟아지는 느낌이야. 미감이 살아나고 구도가 절로 잡혀 아침마다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네. 우주를 통째로 쓸어 담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나 자신이 연못 속 잉어였다, 산속 벌레이기도 하고 들판을 휘젓는 바람이기도 하네.”
⦁성을 담론으로 활동하던 그가 문득 호랑이를 들고 나온 적이 있었다. 13년 전 일이다.
“우연한 일이었어. 고양시 산속 화실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였지. 잠이 들면 호랑이가 내쳐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야. 꿈인가 환상인가 하는 사이 문득 무서워지기 시작하더군”
처음엔 캔버스를 버리고 화선지에다 그렸다. 붓은 간결하나 이미지를 살리려고 선이 대담하고 굵었다. 습작으로 한 1만 마리 쯤 그렸을 때인가. 골프 황제 타이거우즈가 우리나라를 방문, 제주도 라온CC에서 골프대회에 참여하는 일이 생겼다. 그에게 호랑이를 선물하자고 권했다. 선뜻 응한 그가 들고 온 것은 화선지가 아닌 캠퍼스에 옮겨놓은 12마리의 호랑이였다. 모두 12개 액자 속에 각각의 호랑이들이 때로는 엄숙하고 때로는 진지하며 어떤 놈은 헤불쩍 웃고 어떤 녀석은 사랑에 빠져있었다.
⦁강렬할 뿐 아니라 생동감이 넘쳐났고 담백 활달 코믹한데다 절로 신명이 나는 그림들이었네. 세상에 어느 누가 호랑이를 그토록 재미있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 점이 미국 뉴욕서 전시할 기회를 얻었지 아마.
“타이거우즈의 초청을 받았지. 소호미술관에서 오프닝 때 크고 긴 화선지에 대 붓으로 호랑이를 그려 넣는 이벤트도 했었지. 뉴요커들로부터 환대를 받았고 작품료도 두둑하게 챙길 수 있었어. 그런데 얻는 게 있으면 또 소중한 걸 잃게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네” 아내와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처와의 사이에 둔 아들이 백혈병 판정을 받는 일도 생긴다. “흐흐, 다 잃었어. 아들이 저 세상으로 가고 아내가 떠났으며 나는 병을 얻었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신들린 듯 했다. 붓과 물감이 춤을 추고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듯 무수한 영감이 캔버스를 적시는 게 아닌가. 불과 2년 전부터였다. 비단 화폭이 아니래도 좋았다. 빨래판이 캔버스가 되고 고목나무나 철판 따위도 훌륭한 화폭이 돼 주었다.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자연속의 미물(微物)들이 더 할 나위없는 색채로 다시 살아났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고 물고기나 이름 모를 벌레들이 모여들었다. 붉고 샛노랬으며 연두나 녹색들이 빛을 발했다. 잔 꽃들이 머리를 치밀었고 아침 서리를 맞은 연꽃이 노래를 불러댔다. 노을과 산그늘이 출렁이면서 어둠조차 벗겨내고 훌륭한 소재가 돼 주었다.
“4월에는 서울서 한번 전시를 할 참이네. 혼자 안고 있기에는 아깝지 않겠는가?”
다음날 아침 노고단엘 올랐다.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데도 날은 청명하다. 지리는 봉우리에서 허리, 능선을 따라 흐르는 늠름한 기상이 이 나라 최고의 산임을 말해준다. 백두산 호랑이가 천리길을 내딛어 이곳까지 왔다는 이 나라 산세가 이곳에서 바야흐로 마지막 웅지를 펴곤 남해로 곤두박질치는 형국이다. 점심으로 서리고기에 어탕국수로 속을 풀었고 저녁에는 뱀사골의 후배집에서 백숙에다 담가놓은 술독을 열었다. 머루 모과 포도 인삼주등 몇 독을 깼는지 모른다.
다음날 다슬기국으로 속을 다스린 후 다시 서울행 버스에 오를 때 그의 홈페이지에 글 한 자가 올라왔다. ‘有朋自遠方來不亦樂呼’(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 그는 북경기지역 사람들을 위해 의정부에서도 전시회를 가질 계획을 세웠다. 통일을 대비한 통일문화재단과 북경기신문 주최 ‘사랑의 침목 놓기’ 운동에 침목을 캔버스로 자신의 그림을 헌정키로 한 것이다. 글/ 방영훈(본지 이사장) 사진설명/ 위사진은 이목일 작품, 아래 사진은 방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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