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설 이준, 이위종
대륙의 꿈을 꾼 사람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안중근, 손기정
“남북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번영을 꾀하고 동북아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야”
의정부역에 서면 가끔 기차로 유럽으로 떠나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곧 좌절하고 만다. 이유는 갈 수 없는 땅이기에 그렇고, 바다 건너가는 해외(海外)여행에 익숙해 쉽게 포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갈 수 없는 것인가? 남북으로 연결되는 철도는 경의선, 동해선, 경원선이 있고, 이후 시베리아 벌판을 달려 유럽으로 향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있다.
특히 출발지인 경원선은 6.25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의정부에서 출발 양주, 동두천, 연천을 지나 남측 마지막 역인 백마고지역을 만나면 백마고지 전투전적비에는 한국군과 미군이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5,000발, 포탄 총 27만 4,954발을 쏟아부었다는 기록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이는 북경기 지역민들이 평화에 대한 절박함이 누구보다 크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모한 전쟁을 멈춰야 한다. 젊은이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처절한 싸움을 그만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북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남북번영을 꾀하고 동북아 평화를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개화기 ‘대륙의 꿈’을 꾸며 드넓은 광야에서 조국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세계인에 호소하며 대륙으로 가는 길을 개척한 우리들의 영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차로 네덜란드로 간 이상설, 이준, 이위종>
기차로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돼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관들이 있다. 헤이그에 밀파된 특사는 정사(正使)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 부사(副使)에 전 평리원검사 이준, 주로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 이위종 등 모두 3인이다. 세 특사 외에도 헐버트가 처음부터 사절단을 도와 활동하였으며, 박용만(朴容萬)이 미국에서 1907년 7월 초순 헤이그에 파견한 윤병구(尹炳球)ㆍ송헌주(宋憲澍)도 특사 일행을 도왔다. 세 특사의 한국 출발 시기는 각각 달랐다.
먼저 이상설은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기 1년 전인 1906년 4월에 한국을 떠나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준이 1907년 4월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만났다. 그리하여 두 특사는 6월 중순경 시베리아철도 편으로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스부르크(Petersburg: 지금의 레닌그라드)에 도착, 이곳에서 주로공사(駐露公使) 이범진(李範晉)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하였다. 여기서 세 특사는 전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K.I)와 바파로프 등을 통하여 도움을 받고자 활동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세 특사는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도착 즉시 시내의 융(Jong)호텔에 숙소를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한국 침략상을 폭로하여 국권회복에 열강의 후원을 얻는 것이었다.
<기차로 13일 만에 베를린에 도착한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선수로 선발된 손기정은 1936년 6월 4일 3시 기차로 서울역을 출발해 21시 신의주에 도착했고, 6월 5일부터 9일까지 하얼빈과 민루리에 도착했으며, 6월 9일부터 14일까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대륙을 횡단했으며 옴스크, 모스크바 거쳐 16일 바르샤바, 17일에 베를린 프리드리히역에 도착, 서울역을 떠난지 13일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는 현지 적응 훈련 후 1936년 8월 9일 역사적인 제11회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자긍심, 자존감을 일깨우고, 일대 계기가 되었다.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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